D&D 2014의 질병(Disease) VS D&D 2024의 마법적 전염병(Magical Contagion)
세 줄 요약
1. D&D 2014의 질병 규칙 하에서는 1) 질병 치료 방법의 일부를 책에서 못 찾아서 사소한 질병을 처리 못하거나, 2) 오히려 치료하기 어려워야 하는 강력한 질병을 치유의 손길 한 방에 치유해버리는 상황이 종종 연출됨.
2. D&D 2024에서는 사소한 질병을 중독(Poisoned) 상태의 부수적 효과로 변경하여 치료 방식을 일원화함(사소한 질병 치료 방법=중독 상태 제거)
3. 중대한 질병은 마법적 전염병(Magical Contagion)으로 분리되어 쉽게 치료할 수 없게 바뀜. But 치료 방법은 규칙책에서 찾기 쉽고 간단함(중대한 질병 치료 방법=휴양)

어찌 보면 당연한 사실인데, D&D의 세계에도 질병은 있고 이에 대한 규칙도 있다. 이것이 세균, 바이러스, 박테리아 등의 존재를 공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으나...아무튼 있다.
D&D 2014에서 이 질병 상태 이상은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저레벨에 마주칠 수 있는 몬스터 중 '감염된 거대 쥐(Diseased Giant Rat)'라는 야수가 있는데, 얘한테 물리면 건강 내성 굴림에 실패 시 질병에 감염됐다. 병에 걸리면 마법적 방법을 제외하고는 hp를 절대로 회복할 수 없고, 24시간마다 최대 hp는 평균 3(1d6)점씩 깎인다. 최대 hp가 0으로 깎이면 죽는다. 무시무시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무시무시한 질병의 치료 방법은 무엇이 있는가? 바드, 클레릭, 드루이드, 팔라딘, 레인저, 아티피서가 배울 수 있는 2레벨 주문 하급 회복(Lesser Restoration), 팔라딘의 1레벨 직업 특성 치유의 손길(Lay on Hands) 능력 등은 질병(Disease)을 치유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었다. 파티에 클레릭이나 팔라딘 하나 없는 경우는 흔치 않으므로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 흔치 않은 경우가 실제로 벌어지면? 클레릭과 팔라딘이 없으면?
감염된 거대 쥐의 자료 상자를 다시 한 번 잘 읽어봐라. 여기에는 이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나와 있지 않다. 만약 아군에 팔라딘도 없고 클레릭도 없다면? "D&D 세계관에서는 마을마다 클레릭이 한 명씩은 있겠죠. 마을로 돌아가서 치료해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클레릭조차 없는 시골 깡촌이면? 근처 마을에 가서 클레릭을 찾을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그냥 죽으라는 말인가? 물론 이런 경우에는 당황한 던전 마스터가 '지나가던' 클레릭을 출현시켜서 질병을 치료해줄 수도 있지만 부자연스럽다.
사실 답은 다 있다. D&D 5판 베이직 룰 한국어판 70쪽에 보면 '휴양'이라는 막간 활동이 있다. 3일 동안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쉬면 a) hp를 회복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 하나를 끝내기, b) 질병이나 중독 상태 하나에 대한 내성 굴림에 이점 부여하기, 둘 중 하나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감염된 거대 쥐의 질병은 'hp를 회복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이므로 휴양으로 치료할 수 있다. 이렇게 질병은 전부 이 두 가지 효과 중 하나로 치료할 수 있었으므로 질병의 비마법적 치료 방법은 '휴양'이 정석이다.
...문제는 '휴양'이 존재하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거다. 이런 규칙책 구석탱이에 8줄로 짤막하게 쓰여 있는 내용을 누가, 어떻게 기억하는가? 어떻게 규칙책의 모든 내용을 달달 외우고 다녀? 애초에 규칙책은 내용을 기억하는 게 아니라 찾아보는 용도로 옆에 갖다 놓고 읽는 건데, 얘는 찾아내기도 마땅찮다. '질병을 해결하는 방법'이 '막간 활동' 섹션에 적혀 있는데, 이걸 어떻게 알고 찾아가냐? 그렇게 세션 중간에 질병 치료 방법 찾겠다고 한참 규칙책 들여다보면 흐름도 끊기고 재미도 떨어지고...던전 마스터라면 이 상황이 얼마나 식은땀 줄줄 나는 상황인지 알 것이다.
그래서 D&D 2024에서 질병 중 대부분은, 정확히 말하면 '질병'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 중 사소한 것들은 D&D 2024의 규칙 적용 간소화 정책과 맞물려 전부 '중독' 상태의 부수적 효과가 되었다. 예를 들어, "물리면 질병에 걸립니다."가 아니라 "물리면 중독(Poisoned) 상태가 됩니다. 이러한 중독 상태에 걸렸을 때는..."와 같이 질병이 '부수적 효과가 딸려 있는 특수한 중독 상태'로 취급되는 것이다. 그래서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 이제는 질병이 아니라 '중독'이므로 중독 상태를 해제할 수 있는 능력이면 다 된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갑자기 무안단물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게 바로 해독제(Antitoxin). 물론 발더스 게이트 3에서처럼 중독 상태를 아예 해제해주는 강력한 능력은 아니고, 1시간 동안 독에 대한 내성 굴림에 이점을 부여해주는 효과긴 하다. 2024 D&D에서도 이러한 성능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하지만 2014 D&D에서는 질병과 중독이 별개의 상태라서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해독제를 쓸 수는 없었는데, 2024 D&D에서 질병이 중독 상태로 취급되면서 거의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데에 쓸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거의' 만병통치약이지 '완벽한'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질병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들 중 사소한 것들이 중독 상태의 부수적 효과가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질병이 사소하지 않은 것들이고, 이런 질병은 어떻게 되었는가?
결론부터 말해, 사소하지 않은 질병은 캠페인 내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캠페인의 주제나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을 수 있는 중요하고 심각한 질병을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질병들이 바로 마법적 전염병으로 빠진 것이다.
가령, D&D 2014에서는 질병으로 분류되었던 '하수구 역병(Sewer Plague)'이라는 질병이 있다. 감염되면 탈진 단계가 한 단계 높아지고, 히트 다이스를 굴려도 hp가 반만 회복되며 긴 휴식의 'hp 완전 회복 효과'는 무효화된다. 긴 휴식을 취할 때마다 건강 내성 굴림을 실시해서 실패하면 탈진 단계가 또 높아지고, 성공하면 오히려 낮아지고. 탈진 단계가 0단계가 되면 질병이 치료된다. 이것 말고도 몇몇 어드벤처에서는 해당 어드벤처의 분위기를 확립하기 위한 개성적 질병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가령 단편 어드벤처 와일드마운트: 서리역병(Wildemount: Frozen Sick)에 등장하는 혹한의 비애(Frigid Woe)처럼. 이 병에 걸리면 몸의 움직임이 점차 굳어지다가 결국 얼음 동상이 되어버리고 마는데, 어드벤처 전체가 이 혹한의 비애의 치료제를 찾는 것을 목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질병들은 복잡하지만 캠페인의 사실성을 높이고 게임에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으로 기능할 가능성도 있었다.

의도대로 굴러갔다면. 하지만 그렇게 굴러가지 않았다. 왜? 심각한 질병이든 가벼운 질병이든 질병은 질병이고, 질병이라면 1레벨 팔라딘의 치유의 손길만으로도 치료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어떤 질병은 "이 질병은 상급 회복(Greater Restoration, 5레벨 주문) 이상의 치유 주문을 시전해야만 치료할 수 있음!", "이 질병은 특별한 질병이라서 일반적인 치료법이나 마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음!"이라고 조건을 달아놓기는 했지만...너무...초딩 같았다. "나 팔라딘인데, 이거 치료 안돼?", "...안됨.", "왜? 이거 질병이래매. 질병은 치유의 손길로 치유할 수 있어.", "...안됨. 이 질병은 너무너무 강력하고 무시무시한 질병이라서 치유의 손길로 치유 안됨! 아무튼 안됨!" 뭐, DM이 안된다면 안되는 거긴 한데, 플레이어의 창의적 해결방식을 DM이 제재하는 격이라 플레이어도 기분 나쁘고, DM도 찝찝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D&D 2024에서는 중대한 질병은 마법적 전염병으로 분리된 것이다. 하급 회복 주문은 중독 상태를 제거할 수 있으므로 2014 D&D에서 질병으로 분류되었던 놈들 중 대다수를 여전히 치료할 수 있다. 치유의 손길도 마찬가지. 하지만 마법적 전염병은 이러한 방법으로는 치료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냐고? 2014의 휴양 막간 활동을 조금 변형한 치유 방법이 던전 마스터즈 가이드(Dungeon Masters Guide) 2024의 마법적 전염병 항목 바로 밑에 명시되어 있다. 궁금한 분들은 책을 구매하시고...아무튼 마법적 전염병에 대한 자세한 내용과 이를 치료하는 방법을 나란히 기술해 놓았기에 해결 방법을 못 찾아서 절절매는 상황은 많이 줄어들 것이다.
...그래서, 질병이랑 마법적 전염병이 대체 뭐 얼마나 중요하다고 이렇게 말을 길게 늘어놓냐고? 이 문제는 D&D 2014의 어드벤처를 D&D 2024의 규칙으로 진행하려는 던전 마스터와 플레이어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다. 특히 솔트마쉬의 유령(Ghost of Saltmarsh), 아이스윈드 데일: 서리여인의 얼음꽃(Icewind Dale: Rime of Frostmaiden), 어비스 밖으로(Out of the Abyss) 등과 같이 특정 질병이 매우 중요한 키워드로 등장하는 어드벤처를 플레이하려는 경우엔 더더욱 그렇다. 레딧에 질병과 마법적 전염병을 키워드로 검색을 해도 제대로 된 답변을 얻기가 쉽지 않아서 마스터들이 고민이 많을 것이기에, 몇 안 되긴 하겠지만 그런 마스터들의 궁금증을 해소해주려는 용도의 글이다. D&D 2024의 규칙으로 D&D 2014 시절에 나온 어드벤처를 마스터링할 때는 이 점을 고려하여 마스터링을 하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