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TRPG 사람 모으기 어려워서+시간 내기 어려워서 진입도 어렵고 지속하기도 어려움.
2. 혼자 TRPG를 하자니 몰입도 안되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뻔히 알아서 재미도 없음.
이 글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한 사진이다. 조금 더 첨언하자면 본문은 여기에 더해 "나는 왜 미친놈이 되기를 선택하였는가"를 설명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설명을 누구에게 하는지는 사실 글을 쓰는 나도 헷갈린다. 남에게 하는 것일 수도, 어쩌면 나에게 하는 것일 수도.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위의 사진에 나오는 '미친놈'과 같은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 본 적이 있다면, 이 글은 당신에게 유의미한 글이 될 것이다. 아마도...
TRPG가 뭐예요?
나는 TRPG의 세계에 발을 들인지 고작 4년 정도밖에 안 되는, 이른바 'TRPG 뉴비'다. 4년씩이나 경험을 쌓아 놓고 뉴비를 자처한다는 것에 의문을 표할 수도 있겠지만 이쪽 세계가 원래 그렇다. TRPG 유저들의 충성도는 꽤나 높은 편에 속하고, 10년 정도는 TRPG에 대한 경험을 쌓아야 뉴비 칭호를 떼고 당당하게 TRPG 숙련자라고 이름을 내세울 수 있다. 아무튼 TRPG 뉴비인 내가 감히 짐작해 보건대, 내가 TRPG에 입문하기 전인 2020년 경에 비하면 저 "TRPG가 뭐예요"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2024년 10월을 기준으로 했을 때 유의미한 수준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영향력이 큰 계기 중 두 가지를 내 마음대로 뽑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2020년에 침착맨 유튜브 채널에 올라온 '호미니아 탐험대 시리즈'와 2023년에 발매된 CRPG 게임 '발더스 게이트 3'.
침착맨은 마찬가지로 유명 유튜버인 빠니보틀이 "유튜브 대통령"이라고 칭했을 정도로 뉴 미디어에서의 영향력이 막강한 인물이다. 발더스 게이트 3는 또 어떤가? 발매된 해의 게임 관련 상이란 상은 싹쓸이했을 정도로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은 데다가 전세계적으로 무려 1500만장을 팔아 치우는 등 어마어마한 흥행을 자랑하는 게임이다. 당연히 이 두 작품을 접한 사람들이 두 작품의 근간이라고도 할 수 있는 D&D TRPG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볼 수 있다.
안타깝게도 TRPG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제발로 걷어차버리는 질이 안 좋은 게임이다. 당연히 인격체도 아닌 TRPG의 성격이 안 좋다는 뜻은 아니고, TRPG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성질이 신규 유저들의 유입을 어렵게 만든다는 소리다. 일단 기본적으로 TRPG는 여러 명이서 탁자(Table)에 빙 둘러 앉아 역할 연기(Role-playing)를 즐기는 사회적 게임이다. 당연히 TRPG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그 여러 명을 한 탁자 위에 모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TRPG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이 많다면 또 모르겠다. 그렇지만 정기적으로, 같은 장소에 모여서, 몇 시간 동안의 역할 연기를, 길게는 몇 년에 걸쳐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많지 않다. 비단 한국 뿐만 아니라 TRPG를 즐기는 사람의 수가 더 많은 일본, 미국 등의 나라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학교에도 가고, 출근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육아도 하고, 기타 등등...흔히 말하는 현생에 집중하다 보면 사람을 오랜 기간 동안 정기적으로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은 자연스레 어려워진다.
설령 그렇게 사람들이 모였다 하더라도 문제는 또 있다. TRPG에서는 적어도 탁자에 모인 사람들 중 한 명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고 규칙이 공정하게 적용될 수 있도록 하는 '마스터'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마스터 역할을 맡기 싫어한다. 첫 번째 이유로는 마스터 역할에는 큰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물론 TRPG를 하러 모인 사람이라면 마스터든 아니든 자신이 즐기고자 하는 게임의 규칙 숙지는 기본이다. 하지만 '룰 숙지를 하지 못했을 때 발생하는 문제의 심각도'를 따진다면, 참가자가 룰을 몰랐을 때보다 마스터가 룰을 몰랐을 때 발생하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고 치명적이다. 게임 진행 자체가 어려워지니까. 여기에 더해 게임의 서사가 큰 틀에서 어떻게 흘러가도록 할 것인지, 그날 그날의 플레이에서 어떤 장면이 연출되도록 할 것인지 등을 전부 준비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두 사람 이상이 모이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도 조정하고 관리해야 한다. 가히 TRPG라는 조별 과제의 조장이라고 할 만하다.
두 번째 이유로는 TRPG를 하러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에 몰입하여 가상의 세계를 즐기고자 하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보통 마스터는 자신이 만들어낸 세계와 이야기, 각종 수많은 NPC와 몬스터들에 몰입해야 하는 반면 플레이어는 자신의 캐릭터 단 하나에만 몰입하면 된다. 당연히 몰입의 정도에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TRPG에서는 몰입의 정도가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을 결정한다.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가 더해져 TRPG 마스터는 자연스레 희소한 존재가 될 수 밖에 없다.
TRPG 마스터가 희소하다보니 이미 괜찮은 마스터 주위에는 이미 플레이어들이 있다. 새로 유입된 이들은 마스터를 할 의지는 물론 능력도 부족하니 자연스레 괜찮은 마스터가 자신들에게 TRPG 플레이 경험을 선사해주기를 고대한다. 하지만 마스터는 굳이 자신과 잘 맞는 기존의 플레이어들을 버리고 자신과 잘 맞을지 안 맞을지도 모르는 신규 플레이어와 같이 게임을 할 이유가 없다. 물론 TRPG 시장의 파이를 키우겠다는 대승적 동기에서 간간이 마스터 역할을 자처해주는 성인들이 있긴 하지만, 마스터 수요에 전부 대응하기에는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수준이다. 결국 TRPG에 관심을 갖고 이쪽 세계에 발을 들인 수많은 사람들은 한없이 마스터를 기다리기만 하다가 TRPG를 경험도 해보지 못하고 발을 돌리게 된다.
안타깝게도 TRPG의 냉혹한 현실은 신규 유저들만 좌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이미 TRPG를 오래 즐긴 유저라 하더라도 위에서 언급한 TRPG의 근본적 단점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마치 인간이 아무리 용을 써도 엔간한 동물보다 빠르게 뛸 수 없는 것처럼. 만약 당신의 마스터가 갑자기 연애를 하게 되어 주말에 시간을 낼 수 없게 된다면? 당신이 다른 플레이어나 마스터와 다투게 되어 그들과 더이상 TRPG를 즐길 수 없게 된다면? 당신은 신규 유저와 동일한 조건으로 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함께 TRPG를 즐길 사람들을 찾아야 한다. 전자의 이유로 당신의 TRPG 팀이 해체된 거라면 그나마 낫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와 싸워서 팀에서 나오게 된 거라면 당신은 새로운 팀에 들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TRPG 세계는 좁고, 사람들은 당신을 자신들의 팀에 새로 들이기 전에 당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알아볼 것이다. 이 경우는 오히려 신규 유저보다 상황이 더 열악하다고 볼 수 있다.
결국 TRPG라는 놀이는 실제 TRPG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보다 실제로 TRPG를 즐기고 있는 사람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TRPG가 갖고 있는 근본적 문제점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에 쉽게 개선되기도 어렵다.
...그런데 TRPG의 이러한 단점과 관련하여, 누군가가 이런 생각을 했다.
만약에 TRPG를 혼자 할 수 있다면 위에서 언급했던 여러가지 단점을 극복할 수 있다. 사람을 구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부끄러워 역할 연기를 주저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공간과 시간에 구애받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괜찮은 생각 아닌가? TRPG를 즐기지 못하여 시간을 낭비하고 있을 바에는 말이다.
그렇다. 괜찮은 생각이 아니다. 대다수의 TRPG 유저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도 맞는 말이다. TRPG를 혼자 하는 경우에는 다른 게임에 비해 TRPG가 갖는 장점 대다수가 퇴색되어 버린다. 일단 혼자 TRPG를 할 경우에는 당연히 마스터와 플레이어 역할을 동시에 맡아야 할 텐데, 그러면 당연히 자신이 맡은 역할에 대한 몰입감이 상당히 깨져버린다. 가장 큰 문제는 의외성의 소멸이다. TRPG는 참가자들이 다 같이 모여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핵심인 놀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사람들의 창의적 아이디어를 접하는 것이 TRPG의 재미의 근원인 것이다. 그런데 혼자 TRPG를 하게 되면 이 재미를 해치게 된다. 내가 마스터로서 앞으로의 이야기를 다 알고 있고, 어디에 가면 무엇이 있고 무엇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다 꿰차고 있는데 여기에서 무슨 재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몇몇 TRPG 유저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전술했던 솔로 TRPG의 장점을 포기할 수 없었고, 그래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한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얻은 답의 일부를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몰입감이 깨진다고?
의외성이 사라진다고?
몰입감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혼자 마스터도 하고 플레이어도 하는데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그 구체적인 이야기는 아마 다른 글에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솔로 TRPG를 연구한 사람들의 답을 면밀히 고찰한 결과 나 역시 솔로 TRPG의 가치에 주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 역시도 현생에 치여 사느라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사람들을 만나기 어려운 상황인 데에 더해, 나는 특이하게도 마스터 역할과 플레이어 역할에 동시에 흥미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내가 만든 세계관 속에서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플레이어로서 그 세계관과 몰입하여 상호작용하고 싶다는 이중적 욕망이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이다. 내가 마스터 역할을 맡았던 팀에서 어떤 플레이어는 나의 성향에 대해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마스터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이 TRPG의 감성이 아니라 소설의 감성에 가깝다." 그렇기에 4년 동안 TRPG를 즐기면서 마스터 역할을 하면서도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었고, 그것은 플레이어 역할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솔로 TRPG라면,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단점 투성이인 이상한 접근 방식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내 욕망을 오롯이 충족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나는 결정했다.
내가 만든 세계관과 이야기에서, 나만의 캐릭터를 만들어서, 나 혼자서 플레이를 이어나가자고.
혹시 이 글을 읽은 사람들 중 공감을 했다거나, 혹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분들을 위해 다음 글에서는 솔로 TRPG를 위한 여러가지 방법들을 소개한 뒤, 그중 내가 선택한 DM Yourself라는 솔로 TRPG 가이드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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