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솔로 TRPG의 일반적 방법 첫 번째: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부 주사위 굴려서 무작위로 결정하기
2. 솔로 TRPG의 일반적 방법 두 번째: 게임북( "A를 했으면 B로 가시오. C를 했으면 D로 가시오.")처럼 만들어진 어드벤처를 구매해서 하기
지난 글에서 솔로 TRPG 플레이의 의의를 나의 개인사와 더불어 열심히 설명한 바 있다. 그중 사족은 생략하고 중요한 내용만 추린 뒤 필요한 내용을 보충하여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이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예측 가능성이다. TRPG는 일단 다음에 어떤 상황과 이야기가 펼쳐질지를 몰라야 한다. 뒷일을 미리 알 수 있게 되면 객관적인 규칙 적용이 어려워질 것이고, 예측 불가능으로 인한 긴장감도 사라질 것이며 게임에 몰입되지도 않을 것이다.
여기 아이언스원(Ironsworn)이라고 하는 TRPG 룰이 있다. 톰킨 프레스(Tomkin Press)에서 출판한 무료 TRPG 룰로서, 가상의 세계 아이언랜드(Ironlands)를 배경으로 다크 판타지의 감성을 구현한 것이 특징이다. 판타지 TRPG 룰은 필연적으로 "그래서 왜 D&D 안 하고 이거 함?"이라는 질문을 받을 수 밖에 없는데, 아이언스원은 여러 방면에서 D&D와의 차이점을 획득하고자 노력한 것처럼 보인다.
아무튼, 아이언스원의 전반적인 특징에 대해서는 차치하고, 솔로 TRPG 플레잉의 관점에서 아이언스원은 특이한 플레이 방식을 갖고 있다. 첫 번째는 '가이드'인데, 이 방식은 마스터가 게임을 진행하고,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조종하는, 일반적으로 TRPG 플레이하면 떠올리는 방식이다. 문제는 두 번째 방식인 '코옵(Co-op)'과 세 번째 방식인 '솔로(Solo)'이다. 코옵은 두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함께 플레이하는 것이고 솔로는 한 명의 플레이어가 혼자 플레이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마스터가 전혀 필요하지 않다. 행동의 결과, 세상의 세부 사항, 스토리의 흐름 등을 무작위로 결정하는 것이다.
솔로 TRPG 쪽에서는 이러한 무작위 시스템을 오라클(Oracle)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던전을 탐험하는 솔로 TRPG를 한다고 치자. 그러면 플레이어 겸 마스터는 던전의 크기나 각 던전의 세세한 내용을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이, 그냥 던전 탐험용 오라클과 주사위를 준비하면 된다. 방에 들어가기 전에(혹은 방에 들어간 다음이든) 오라클을 이용해 주사위를 굴려 방의 크기, 방에 있는 사물들, 방에 있는 몬스터들, 몬스터의 태도 등을 모두 무작위로 결정한다. 그러면, 당연한 말이지만 플레이어는 던전의 다음 방에서 무엇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누군가는 여기까지 읽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거 '무작위 표에서 주사위 굴리기' 시스템 아냐?" 비슷하다. 오라클은 사실 TRPG 유저들에게는 그리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굳이 차이를 두자면, 무작위 표에서 주사위 굴리기는 객관식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해주지만 오라클은 주관식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해준다. 예를 들어 보자. 플레이어가 "지금 눈앞에 있는 계곡에 적들이 숨을 법한 장소가 있나요?"라는 질문을 했다. 무작위 시스템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다. "그건 모르겠고, 여기에 나오는 방랑 몬스터 목록은 있는데..." 하지만 오라클은 줄 수 있다. 해당 질문의 가능성을 판단한 뒤, 이를 주사위 값에 반영하여 특정 수치 이상이면 "예", 아니면 "아니오"라고 답을 하는 것이다. 주관식 질문에 답을 하는 것, 이것이 오라클로 하여금 솔로 TRPG 플레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아이언스원의 규칙서에는 이러한 오라클이 무려 19가지가 존재하여 플레이를 탄탄하게 뒷받침해 준다. 즉, 아이언스원은 오라클이라고 하는 무작위 변수 창출 시스템을 통해 예측 가능성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솔로 TRPG 플레잉에 접근한다. 관심이 있다면 한 번 홈페이지에 가서 다운로드를 해보길 권한다. 영어를 번역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요새는 ChatGPT에 PDF 파일 넣고 번역해 달라 하면 번역도 해 준다.
<아이언스원 공식 홈페이지>
물론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고, 오라클 의존성 플레이도 자연스럽게 몇 가지 단점을 수반한다. 첫 번째 단점은 게임 플레이의 연속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아 몰입감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앞에 나왔던 사건과 뒤에 나왔던 사건의 연결고리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 전부 우연에 의해 결정되었으니까. 이는 자연스레 두 번째 단점을 초래하게 된다. 바로 서사의 깊이가 얕아진다는 것이다. TRPG에서 이야기를 어느 정도 중시하는 플레이어라면 오라클에 모든 것을 의존해버리는 방식은 별로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게임북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진은 실제로 내가 어렸을 적에 재미있게 읽었던 게임북의 본문 중 일부이다(그리고 정답은 3쪽이다). 90년대에는 게임북이라는 것이 꽤나 유행이었는데, 대충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책이 어떠한 상황과 함께 선택지를 몇 개 제시해주면, 독자는 어떤 선택지를 고를지를 결정한 뒤 해당 선택지에서 시키는 대로 따른다. 대충 A 선택지는 19쪽으로 가시오, B나 C 선택지는 35쪽으로 가시오, 뭐 이런 식이다. 이러한 게임북이 기술 발전에 힘입어 인터랙티브 무비,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 비주얼 노벨 등으로 변모했다고 볼 수 있겠다.
왼쪽은 가장 유명한 TRPG 규칙인 던전스 앤 드래곤스(이하 D&D)의 솔로 플레잉 전용 어드벤처 "랭스턴의 늑대들(The Wolves of Langston)"이고 우측은 또 하나의 유명 TRPG 규칙인 크툴루의 부름 RPG(이하 COC)의 1인 시나리오 "불길에 홀로 맞서다(Alone Against the Flames)"이다. 두 책 모두 해당 규칙을 사용한 보통의 어드벤처/시나리오와는 그 구성이 다르다. 일반적인 D&D 어드벤처의 경우 앞부분에는 무조건 해당 어드벤처의 스토리를 요약해 놓은 요약도와 더불어 마스터 역할을 수행할 때 알아야 할 내용들이 나온다. 그런데 랭스턴의 늑대들 어드벤처의 경우 당연히 그런 내용은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다. 냅다 "정말 아름다운 날입니다. 새들은 지저귀고...당신은 지옥에서 불타야 합니다. 263번으로 가세요." 이런 식으로 어드벤처가 시작된다. 그러면 또 상황이 제시되고, 당신은 당신이 고른 선택지가 가리키는 번호로 이동해야 한다. 이러한 방법은 솔로 TRPG 플레이가 갖는 예측 가능성의 문제를 오라클 시스템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결한다. 그냥 안 알려주는 것. 가장 단순하지만 또 가장 강력한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도 당연히 단점을 수반한다. 첫째는 내용이 금방 끝난다는 점이다. 분기형 서사를 쓰는 것은 매우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최대한 많은 분기를 다루려고 할 수록 책이 두꺼워진다. 600쪽 짜리 어드벤처를 출판할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분기의 가짓수를 줄이자니, 그러면 TRPG의 가장 중요한 장점 중 하나인 자유도를 해치게 된다. 분기의 다양성, 책의 두께 등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고민하다보면 결국 어드벤처는 적당한 두께에 짧은 이야기라는 결과물로 나타나게 된다. 둘째는 아무리 분기를 다양하게 준비하려고 고민해도 전술했던 문제들로 인해 결국 일반적인 TRPG 플레이 방식보다는 자유도가 제한된다는 점이다.
사실 이 방식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지금처럼 범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아무튼, 현재 AI TRPG 마스터는 꽤나 그럴듯한 수준으로 마스터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사진은 주호민 작가가 ChatGPT와 함께 D&D 규칙으로 TRPG를 진행하는 영상을 캡처한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꽤나 그럴듯 하게 상황을 제시하고, 규칙을 적용하고, 자유도 높은 선택지를 모두 수용해 준다.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라클에 의존하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이긴 하지만. 그래도 AI가 NPC의 대사, 상황의 묘사 등을 굉장히 수준 높은 문장력으로 읊어주기에 몰입도는 상당하다.
사실 몇 년만 지나면 이 글에서 논의하는 내용은 다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그냥 마스터 역할을 냅다 AI에게 맡겨버리면 될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몇 년이 뭐냐, 당장 ChatGPT의 커스텀 GPT 기능을 활용해서 특정 어드벤처의 내용을 학습시킨 뒤 마스터 역할을 시켜도 괜찮을 것 같긴 하다. 어쨌든, 우리가 지금 진지하게 논의할 방법은 아니므로 이 방법에 대한 분석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세 번째 방법을 제외하면 사실 솔로 TRPG 플레이의 방법론은 크게 첫 번째와 두 번째로 갈린다. 그 외의 다른 방법들은 저 두 방법 사이의 가운데 어느 즈음에 위치해 있는 것들이다. 그리고 내가 앞으로 사용하고자 하는 솔로 TRPG 플레이 방법 역시 저 두 방법 사이에서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 제3의 길을 가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가능케 해주는 책이 바로 DM Yourself이다.
DM Yourself는 일반적인 판타지 TRPG에도 적용이 가능하지만, 보통 솔로 D&D 플레이를 할 때 사용되는 일종의 보조 규칙서 같은 책이다. 드라이브 스루 RPG(http://www.drivethrurpg.com)나 던전 마스터 길드(http://www.dmsguild.com)와 같은 RPG 관련 서적을 판매하는 사이트에서 단돈 몇 천원의 비용만 내면 구매할 수 있다.
...책 홍보를 하려는 건 아니고, 아무튼 굳이 이 책을 사용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이 책이 추구하는 목표를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책의 내용과 이 책을 통한 솔로 TRPG 플레이 방법의 상세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이야기 하자.
DM Yourself로 솔로 TRPG(D&D) 플레이하기 - DM Yourself 리뷰 (2) | 2024.1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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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홀로 TRPG를 하는가 - 솔로 TRPG의 의의 (6) | 2024.10.11 |